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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1 (새 문서) | 1 | [[분류:검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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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11 | 3 | [clearfix] |
| r1 (새 문서) | 4 | == 개요 == |
| 5 | '''문체반정'''은 [[정조(이성)|정조]]가 당시 유행하던 패관문체를 금지하고 순정고문을 부흥하려 한 검열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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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1 (새 문서) | 7 | == 언어별 명칭 == |
| 8 | ||<-2><tablealign=center><tablewidth=400> 언어별 명칭 || | |
| 9 | ||<width=25%> [[한국어]] ||<width=75%> 문체반정[* 한자 표기: 文體反正] || | |
| 10 | || [[중국어]](간체) || 文体反正 || | |
| 11 | || 중국어(번체) || 文體反正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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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2 | 13 | == 배경 == |
| r6 | 14 | 18세기에 [[경기도]]와 [[서울특별시|한성]]의 경화사족의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이 강했고 상업과 유통 경제의 성장, [[청국]]과의 교역을 통해 새로운 문물이 [[한국|조선]]으로 유입되었다. 경화사족은 청국과의 교류를 통한 고증학, 북학, 서학 등의 새로운 지식을 수용했고 이를 확산했으며 이에 따라 서화, 원예 등 감상과 수집을 중시하는 문화와 패관문체가 발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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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7 | 16 | [[정조(이성)|정조]]는 패관문체를 문풍을 해치는 요인으로 보았다. 특히 1780년대부터 문체에 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고, 문체 교정에 대한 논리와 서학에 대한 경계가 맞물렸다. 정조는 도덕, [[정치]], 학문을 통합하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했고, 이에 따라 문풍과 세도가 하나라는 도문일체론과 글에는 마땅히 유교의 도리가 실려야 한다는 문이재도론의 이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선비들이 경전과 같은 정통 고문보다는 패관문체로 글을 쓰는 현상을 문풍의 위기로 인식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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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8 | 18 | == 전개 == |
| r10 | 19 | [[정조(이성)|정조]]는 당송팔가문, 육경, 제자, 주자문 등을 모범으로 삼아 문품의 교정을 추구했다. 개인의 문학적 취향뿐 아니라 과거(科擧)의 답안과 같은 공적인 글쓰기 역시 통제했다. 1785년에 권일신, 이승훈, 정약용 등의 남인 정치인들이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 의식을 거행하다 적발되었다. 이후 대전통편, 무예도보통지, 병학통과 같은 국정 실용 서적이 간행되었다. 1791년에 [[전라도]]의 권상연과 윤지충이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사기영선, 육주약선, 주서백선 등이 편찬되어 관각문의 모범으로 취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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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진산 사건을 계기로 서학 문제가 남인 정치인들에 대한 정치적 공세로 이어졌다. 또한 정조는 서학을 경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학, [[소품문]], 패관문체의 연관성을 제기하였다. 그렇게 문체반정을 통해 소품문을 즐긴 관료들에게도 책임을 물음으로써, 서학 문제를 둘러싼 비판의 방향과 범위가 재조정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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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17 | 23 | === 처벌된 관료 === |
| r12 | 24 | * 김조순: 1787년에 평산냉연이라는 소설을 읽다가 발각되어 반성문을 작성했다. |
| 25 | * 남공철: 1792년에 패관문체 구절을 썼다가 직함이 박탈되고 자송문 작성을 지시받았다. | |
| r15 | 26 | * 박지원: 박지원이 작성한 열하일기를 정조는 법망을 빠져나간 거물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정조는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를 아정한 글 한 편을 지어 올리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오를 수 있는 관직인 남행문임에 임명하겠다고 박지원에게 약속했다. 박지원은 정조에게 사죄하는 답서를 보냈지만 즉시 반성문을 지어 바치지는 않았다. 1797년에 면천군수에 임명되었을 때 이방익표류기를 제출했고, 1798년에는 실질적인 농업 개혁을 다룬 과농소초와 한민명전의를 바쳤다. 이를 읽은 정조는 박지원을 사면했다. |
| r12 | 27 | * 심상규: 1792년에 패관문체와 관련된 작품을 탐닉한 것으로 인해 반성문을 제출했다. 그러나 문장이 어색하다는 이유로 정조가 한글 작성 및 주해를 달게 하여 곤욕을 치렀다. |
| 28 | * 이상황: 1787년에 평산냉연이라는 소설을 읽다가 발각되어 반성문을 작성했다. | |
| r13 | 29 | * 이옥: 1792년에 과거 답안에 소설체를 사용한 이유로 정거 및 사륙문 50수벌작 작성이라는 처벌을 받았다. 1795년에 응제 표문에 소품체를 사용하여 충군 조치되었고, 1796년에는 별시 초시 1등으로 합격했으나 책문 격식 미달로 최종 탈락했다. |
| r18 | 30 | == 영향 == |
| 31 | * 정조 사후 1801년에 신유박해가 발생하여 유화적인 규제가 억압적인 탄압으로 대체되었다. | |
| 32 | * 정조의 문체반정으로 세력을 키우거나 사면한 김조순 등에 세도 정치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 |
| 33 | * 정조의 지속적인 검열로 인해 자유로운 사상과 패관문체가 위축되었고, 순정고문이 확산되었다. | |
| r16 | 34 | == 여담 == |
| 35 | * 박제가와 이덕무는 명국 및 청국에서 만들어진 서적을 읽었으나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된 이후 고증학 및 북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 |
| 36 | * 서유구는 실질적인 민생 기여를 강조하며 임원경제지를 작성했다. | |
| 37 | * 정약용은 문체반정 이전에 이미 패관문체의 유행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국내의 잡서를 모두 불태우고 수입자를 중벌로 다스려야 한다며 정조를 지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