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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반정(비교)

r9 vs r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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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3[[정조(이성)|정조]]는 패관문체를 문풍을 해치는 요인으로 보았다. 특히 1780년대부터 문체에 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고, 문체 교정에 대한 논리와 서학에 대한 경계가 맞물렸다. 정조는 도덕, [[정치]], 학문을 통합하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했고, 이에 따라 문풍과 세도가 하나라는 도문일체론과 글에는 마땅히 유교의 도리가 실려야 한다는 문이재도론의 이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선비들이 경전과 같은 정통 고문보다는 패관문체로 글을 쓰는 현상을 문풍의 위기로 인식한 것이었다.
1414== 전개 ==
15[[정조(이성)|정조]]는 당송팔가문, 육경, 제자, 주자문 등을 모범으로 삼아 문품의 교정을 추구했다. 개인의 문학적 취향뿐 아니라 과거(科擧)의 답안과 같은 공적인 글쓰기 역시 통제했다. 1785년에 권일신, 이승훈, 정약용 등의 남인 정치인들이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 의식을 거행하다 적발되었고, 이후 대전통편, 무예도보통지, 병학통과 같은 국정 실용 서적이 간행되었다. 1791년에 [[전라도]]의 권상연과 윤지충이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 사형에 처해졌고, 이후 사기영선, 육주약선, 주서백선 등이 편찬되어 관각문의 모범으로 취급되었다.
15[[정조(이성)|정조]]는 당송팔가문, 육경, 제자, 주자문 등을 모범으로 삼아 문품의 교정을 추구했다. 개인의 문학적 취향뿐 아니라 과거(科擧)의 답안과 같은 공적인 글쓰기 역시 통제했다. 1785년에 권일신, 이승훈, 정약용 등의 남인 정치인들이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 의식을 거행하다 적발되었다. 이후 대전통편, 무예도보통지, 병학통과 같은 국정 실용 서적이 간행되었다. 1791년에 [[전라도]]의 권상연과 윤지충이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사기영선, 육주약선, 주서백선 등이 편찬되어 관각문의 모범으로 취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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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진산 사건을 계기로 서학 문제가 남인 정치인들에 대한 정치적 공세로 이어졌다. 또한 정조는 서학을 경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학, [[소품문]], 패관문체의 연관성을 제기하였다. 그렇게 문체반정을 통해 소품문을 즐긴 관료들에게도 책임을 물음으로써, 서학 문제를 둘러싼 비판의 방향과 범위가 재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