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1. 개요 [편집]
한국의 문화를 정리한 문서이다.
2. 성문화 [편집]
고려 시대에는 남성과 여성의 혼욕이 흔했다. 그리고 만전춘이나 쌍화점과 같은 시가에서 대담한 애정 표현이 드러나 있을 정도로 성에 대해 자유분방했다. 하지만 성에 관한 규제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는데, 남편이 있는 여성이 간통할 경우, 명단이 작성되어 침공, 즉 바느질에 관한 노역이 부과되었고 사망 이후 내외 기록이 강조되었다. 또한 간통으로 인해 태어난 자녀는 관직 진출이 금지되었다. 그래도 조선 시대에 비해 여성의 권리는 많이 존중되었는데, 아내는 남편 사후에도 여성 호주로 가문을 주도할 수 있었고, 비구니가 되는 것은 제2의 주체적 인생 경로 선택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결혼한 여성의 간통은 금지되었지만 재혼은 일반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선 시대 전기에도 재산 상속, 제사에서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 없이 균등하게 이루어지는 등 여성의 권리가 조선 시대 후기에 비해 보장되었다.
조선 시대 후기에는 장자를 우대하고 남녀를 다르게 대하는 분위기가 강해졌고, 또한 동성불혼, 이성불양의 원칙이 확산되었다. 이를 통해 혈통 중심의 가부장적 친족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체제가 확립된 이후 적장자가 단독으로 제사에 임하는 원칙이 확립되었고, 대를 이을 자손이 없을 경우에는 양자 입양이 일반적이었다. 재산 상속의 경우에도 아들에게 재산이 더 많이 분배되었고, 특히 적장자가 우대되었다. 반면, 딸은 상속권이 대폭 축소되었다. 족보는 출생 순서가 아닌 아들부터 먼저 기재되었고, 모계에 대한 내용은 일대에 한정하여 기록되었다.
조선 시대 후기에는 장자를 우대하고 남녀를 다르게 대하는 분위기가 강해졌고, 또한 동성불혼, 이성불양의 원칙이 확산되었다. 이를 통해 혈통 중심의 가부장적 친족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체제가 확립된 이후 적장자가 단독으로 제사에 임하는 원칙이 확립되었고, 대를 이을 자손이 없을 경우에는 양자 입양이 일반적이었다. 재산 상속의 경우에도 아들에게 재산이 더 많이 분배되었고, 특히 적장자가 우대되었다. 반면, 딸은 상속권이 대폭 축소되었다. 족보는 출생 순서가 아닌 아들부터 먼저 기재되었고, 모계에 대한 내용은 일대에 한정하여 기록되었다.
2.1. 결혼 [편집]
고려 시대에 남성은 대체로 20세 이상에 결혼했고, 여성은 대체로 15~16세에 결혼했다. 그러나 남성은 30세 이상의 독신자가 많았고, 여성도 24~25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결혼한 경우가 빈번했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로 인한 성비 불균형과 폐쇄적인 문벌의 문화 때문에 발생했는데, 남성들 중에서 승려가 된 경우가 제법 있는 바람에 성비 불균형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에는 조선 시대에 비해 결혼을 의무로 보지 않는 가치관이 강한 것의 영향도 있었다. 또한 문벌의 경우, 철저히 문벌에 해당하는 사람들끼리의 결혼을 지향하여 조건에 부합할 때까지 결혼이 연기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고려 시대에는 서류부가혼이 대표적인 결혼이었다. 처가에서 결혼식이 진행된 후 남편은 계속 그곳에 거주했으며, 관직에 오르는 등의 사유가 생길 때 분가했다. 남편은 다른 곳에 거주하다가도 처가가 있는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장모와 장인을 직접 부양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무남독녀의 경우, 거의 평생 친정에서 거주했다. 부부에게 외가와 친가 모두 강한 영향을 행사했으며, 사위나 외손자도 공음전 소유, 음서 응시가 가능했다. 장례식의 경우에도 친조부모, 외조부모, 장모 및 장인 가릴 것 없이 착용 기간은 1년으로 동일했다. 조선 시대 전기에도 서류부가혼이 지속되었으나 점점 가부장 문화가 우세해졌다. 제사의 경우에도 아들과 딸이나 장유에 상관 없이 공평하게 부담했고, 비용 역시 자녀들이 균등하게 부담했다. 조상의 제사를 나누어 책임지는 형태도 존재했다. 재산도 자녀에 대해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 없이 균등하게 배분되었고, 모친의 신분에 따른 적서 간의 차등만 존재했다.
조선 시대에는 경국대전에 의하면 사족의 딸이 30세가 되었음에도 가난해서 결혼하지 못한 상태라면 예조에서 곡식과 옷감을 하사함으로서 결혼을 지원할 정도로 국가에서 결혼을 장려했다. 속대전에 의하면 한성과 각 도에서 혼기를 놓친 여성을 조사하여 각 도시에서 특별히 지원했다고 한다. 지원 대상은 양반은 물론이고 상민도 해당했다. 이렇게 국가가 결혼을 장려한 것은 가족 구성을 통한 유교의 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결혼하지 못한 처녀는 원한을 품어 재앙을 부른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통치의 기반인 양민 인구의 증가를 위해서였다. 또한 조선 시대에 처가살이가 줄어들고 시집살이가 늘어났다. 왕실과 사대부가 먼저 이러한 모습을 보였고, 점차 민간인들에게 확산되었다. 동성동본에 해당하는 사람끼리의 결혼은 유교의 관점에서 옳지 않은 행동으로 여겨졌고, 부모의 장례식 도중에 결혼하는 것도 엄격히 금지되었다. 또한 결혼식에서 가문을 과시하는 지나친 사치는 규제되었다. 이혼의 경우, 이혼 소송의 주체는 대체로 남성이었고, 결정권도 남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대명률에 준하여 처리하여 사실상 이혼이 불가능에 가까운 구조였는데 칠출[1]에 해당해야 이혼이 가능했고, 칠출에 해당하더라도 삼불거[2]에 해당하면 이혼이 불가능했다.
고려 시대에는 서류부가혼이 대표적인 결혼이었다. 처가에서 결혼식이 진행된 후 남편은 계속 그곳에 거주했으며, 관직에 오르는 등의 사유가 생길 때 분가했다. 남편은 다른 곳에 거주하다가도 처가가 있는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장모와 장인을 직접 부양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무남독녀의 경우, 거의 평생 친정에서 거주했다. 부부에게 외가와 친가 모두 강한 영향을 행사했으며, 사위나 외손자도 공음전 소유, 음서 응시가 가능했다. 장례식의 경우에도 친조부모, 외조부모, 장모 및 장인 가릴 것 없이 착용 기간은 1년으로 동일했다. 조선 시대 전기에도 서류부가혼이 지속되었으나 점점 가부장 문화가 우세해졌다. 제사의 경우에도 아들과 딸이나 장유에 상관 없이 공평하게 부담했고, 비용 역시 자녀들이 균등하게 부담했다. 조상의 제사를 나누어 책임지는 형태도 존재했다. 재산도 자녀에 대해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 없이 균등하게 배분되었고, 모친의 신분에 따른 적서 간의 차등만 존재했다.
조선 시대에는 경국대전에 의하면 사족의 딸이 30세가 되었음에도 가난해서 결혼하지 못한 상태라면 예조에서 곡식과 옷감을 하사함으로서 결혼을 지원할 정도로 국가에서 결혼을 장려했다. 속대전에 의하면 한성과 각 도에서 혼기를 놓친 여성을 조사하여 각 도시에서 특별히 지원했다고 한다. 지원 대상은 양반은 물론이고 상민도 해당했다. 이렇게 국가가 결혼을 장려한 것은 가족 구성을 통한 유교의 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결혼하지 못한 처녀는 원한을 품어 재앙을 부른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통치의 기반인 양민 인구의 증가를 위해서였다. 또한 조선 시대에 처가살이가 줄어들고 시집살이가 늘어났다. 왕실과 사대부가 먼저 이러한 모습을 보였고, 점차 민간인들에게 확산되었다. 동성동본에 해당하는 사람끼리의 결혼은 유교의 관점에서 옳지 않은 행동으로 여겨졌고, 부모의 장례식 도중에 결혼하는 것도 엄격히 금지되었다. 또한 결혼식에서 가문을 과시하는 지나친 사치는 규제되었다. 이혼의 경우, 이혼 소송의 주체는 대체로 남성이었고, 결정권도 남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대명률에 준하여 처리하여 사실상 이혼이 불가능에 가까운 구조였는데 칠출[1]에 해당해야 이혼이 가능했고, 칠출에 해당하더라도 삼불거[2]에 해당하면 이혼이 불가능했다.
3. 언어 문화 [편집]
한국에서는 공용어인 한국어가 주로 사용된다. 방언의 경우 경기 지방, 관북 지방, 관서 지방, 영남 지방, 영동 지방, 영서 지방, 해서 지방, 호남 지방, 호서 지방에서 각각 경기 방언, 관북 방언, 관서 방언, 영남 방언, 영동 방언, 영서 방언, 해서 방언, 호남 방언, 호서 방언이 주로 사용되며, 제주 지방에서는 제주어가 주로 사용되기도 한다.
4. 의복 문화 [편집]
한국의 전통의상은 한복이다.
5. 주거 문화 [편집]
한국의 전통가옥은 한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