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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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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개 == 삼정의 문란과 지주제의 문제로 인해 농민들의 삶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고부의 군수였던 조병갑이 부패를 일삼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4년 1월에 동학 농민 운동이 발생했고, 조병갑이 도주했으며 고부에서는 박원명이 새로운 군수로 취임했다. 전봉준의 지도 하에 농민들은 무기고의 무기를 차지했고, 곡식을 주인들에게 돌려주었다. 동학 농민군은 확대 및 개편을 통해 전열 체계를 갖추었고, 반봉건 및 반제국주의의 성격을 지닌 격문을 제시했다. 1894년 5월에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이 승리하자 봉기를 관망하던 많은 농민들이 동학 농민군에 들어옴으로써 동학 농민군의 전력이 강화되었다. 이후 장성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이 승리했고, [[전라도]]의 수많은 농민들이 동학 농민군에 합류했다. 결국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에 입성했다. 이에 [[한국|조선]]은 [[청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청국은 [[충청도]] [[아산시|아산]]에 군대를 파견했다. 또한 톈진 조약에 따라 [[일본]]도 [[경기도]] [[인천광역시|인천]]에 군대를 파견했다. 동학 농민군은 [[일본]]과 [[청국]]을 우려하여 폐정개혁안을 제시하여 전주 화약을 체결했고, 해산했다. 당시 동학 농민군을 지도하던 전봉준은 청국 국군의 파병을 크게 의식했고, 일본과 청국의 개입으로 인한 [[한국|조선]]의 위기와 국제 분쟁의 확대를 막고자 했다. 조선은 관군의 병력만으로는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여 청국에게 지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중지 요청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군과 청국 국군은 각각 [[인천광역시|인천]]과 [[아산시|아산]]에 상륙했고, 양국 군대를 철수시킬 명분이 필요했기에 전주 화약을 체결한 것이었다. 전주 화약이 체결되었음에도 [[한국|조선]]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동학 농민군은 집강소를 설치했다. 또한 일본 국군과 청국 국군이 계속해서 조선에 주둔했고,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해졌다. 결국 1894년 12월에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이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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