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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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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전쟁]] ||<-3><tablebordercolor=#536349><tablebgcolor=transparent><bgcolor=#536349><tablewidth=400><tablealign=right> {{{#FFF {{{+5 '''동학 농민 운동'''}}}}}} || ||<-3><bgcolor=#536349><color=#FFF> '''기간''' || ||<-3> 1894년 1월 11일~1894년 12월 23일 || ||<-3><bgcolor=#536349><color=#FFF> '''장소''' || ||<-3> [[파일:조선 국기.svg|width=30]] [[한국|조선]] || ||<-3><bgcolor=#536349><color=#FFF> '''교전 세력''' || ||<width=33%> [[파일:조선 국기.svg|width=30|width=30]] [[한국|조선]][br][[파일:청국 국기.svg|width=30]] [[청국]] ||<width=34%> 동학 농민군 ||<width=33%> [[파일:일본 국기(1870년~1999년).svg|width=30]] [[일본]] || ||<-3><bgcolor=#536349><color=#FFF> '''결과''' || ||<-3> 동학 농민군의 패배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학 농민 운동'''은 1894년에 발생한 농민 봉기이다. == 언어별 명칭 == ||<-2><tablealign=center><tablewidth=400> 언어별 명칭 || ||<width=25%> [[한국어]] ||<width=75%> 동학 농민 운동[* 한자 표기: 東學 農民 運動][br]갑오농민전쟁[* 한자 표기: 甲午農民戰爭] || || [[영어]] || Donghak Peasant Movement || == 배경 == 1860년에 민간 신앙과 유불선의 요소를 기반으로 동학이 창시되었다. 동학은 만민이 평등한 사회를 구축하는 것을 지향했으며, 반봉건적 성향과 반침략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19세기에 [[한국|조선]]에서는 경제적으로 몰락한 농민들과 양반들, 유량 지식인들이 증가했다. 이들은 지배층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조선의 정치 체제를 비판했다. 즉, 피지배층의 계급 의식이 변화했고, 민족 의식이 성장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양민란, 이필제의 난과 같은 민란이 발생했고, 이 민란에는 몰락한 양반들도 참여했다. 민란에 참여한 사람들은 군사학을 공부하여 세력을 키웠으며 관인, 부호, 상인, 외국인을 습격했다. 이러한 농민 전쟁의 조직 기반에 영향을 준 것이 바로 동학이다. 특히 동학은 계급 의식과 민족 의식이 강한 [[전라도]]와 [[충청도]]에 크게 확산되었다. 농민 전쟁은 동학 접주층과 변혁지향적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1892년에 최제우의 처형에 대한 반발로 교조 신원 운동이 발생했다. 사람들이 [[전라도]]에서 집회를 했고, 이듬해인 1893년에 [[서울특별시|한성]]에서 상소를 시도했고, [[보은군|보은]]에서도 집회를 했으며, 사발통문이 제작되었다. == 전개 == 삼정의 문란과 지주제의 문제로 인해 농민들의 삶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고부의 군수였던 조병갑이 부패를 일삼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4년 1월에 동학 농민 운동이 발생했고, 조병갑이 도주했으며 고부에서는 박원명이 새로운 군수로 취임했다. 전봉준의 지도 하에 농민들은 무기고의 무기를 차지했고, 곡식을 주인들에게 돌려주었다. 동학 농민군은 확대 및 개편을 통해 전열 체계를 갖추었고, 반봉건 및 반제국주의의 성격을 지닌 격문을 제시했다. 1894년 5월에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이 승리하자 봉기를 관망하던 많은 농민들이 동학 농민군에 들어옴으로써 동학 농민군의 전력이 강화되었다. 이후 장성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이 승리했고, [[전라도]]의 수많은 농민들이 동학 농민군에 합류했다. 결국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에 입성했다. 이에 [[한국|조선]]은 [[청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청국은 [[충청도]] [[아산시|아산]]에 군대를 파견했다. 또한 톈진 조약에 따라 [[일본]]도 [[경기도]] [[인천광역시|인천]]에 군대를 파견했다. 동학 농민군은 [[일본]]과 [[청국]]을 우려하여 폐정개혁안을 제시하여 전주 화약을 체결했고, 해산했다. 당시 동학 농민군을 지도하던 전봉준은 청국 국군의 파병을 크게 의식했고, 일본과 청국의 개입으로 인한 [[한국|조선]]의 위기와 국제 분쟁의 확대를 막고자 했다. 조선은 관군의 병력만으로는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여 청국에게 지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중지 요청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군과 청국 국군은 각각 [[인천광역시|인천]]과 [[아산시|아산]]에 상륙했고, 양국 군대를 철수시킬 명분이 필요했기에 전주 화약을 체결한 것이었다. 전주 화약이 체결되었음에도 [[한국|조선]]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동학 농민군은 집강소를 설치했다. 또한 일본 국군과 청국 국군이 계속해서 조선에 주둔했고,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해졌다. 결국 1894년 12월에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이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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